어릴 때 만화 ‘아기공룡 둘리’를 보면서 집주인 고길동을 나쁜 놈이라 생각했었다. 실제 만화에서도 악역같이 묘사한다. 가끔 따뜻한 면도 보여주지만, 대체로 둘리 일행을 괴롭히는 역할이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고길동처럼 착한 이도 별로 없다. 정체불명의 외계 생명체 무리에게 무료로 안식처를 제공하고 심지어 그들이 집을 엉망으로 만들어 재산권을 침해하는데도 경찰에 신고하지 않는다. 이 정도면 거의 보살이다.

프레임을 나누면 사건을 있는 그대로 보기 어렵다. 재벌, 금수저, 건물주 같은 계급적 단어를 쓰면 더 그렇다. 어떤 한 개인이 완전히 몰매 맞는 사건일지라도 앞에 재벌을 붙이면 편하게 욕해도 되는 대상 같아 보인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라는 절대 권력을 가진 강자이니까. 악질 임차인을 만나 고생한 사연도 앞에 돈 많은 건물주란 호칭을 붙이면 딱히 안타깝지 않다. 그는 가진 게 많고 알아서 앞가림 잘할 사람이니까.

재벌도 건물주도 결국 다 같은 사람이다. 내가 아까워하는 돈은 그들도 아까워한다. 돈 많다고 돈 안 아까운 것 아니다. 부자라고 해서 딱히 다른 차원의 정신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세상에 차별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런 걸 없애는 건 역차별이 아니다. 어떤 대상이든 있는 그대로 보고 역지사지할 수 있는 정신과 태도가 필요하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야 우리 사회도 더 좋은 방향으로 의미 있는 변화가 생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