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우울증을 심하게 앓던 친구가 예전 이야기를 하며 갑자기 고맙다고 했다. 생각해 보니 우울증 심하던 시절에 가장 도움이 됐던 건 나였던 것 같다고. 그래서 물었다. 내가 뭘 그리 도와줬냐고. 당시에 자기를 대하는 내 태도에서 본인 문제의 근원을 알게 됐다고 했다. 보통은 죽고 싶다고 하면 그런 소리 하지 말라거나 위로하기 마련인데 나는 어떻게 죽을 건지 계획을 말하라고 했단다.

그래서 자기가 어떻게 죽을지 방법을 말하면 내가 그때마다 담담하게 왜 그렇게 죽으면 안 되는지 설명해 줬다고 한다. 그것도 매우 논리적으로. 그러면서 죽는 계획 하나도 똑바로 못 세운다고 짜증 내고 한심해했다고. 하여간 누가 들으면 인성 파탄이 따로 없다. 그런데 이렇게 죽음 자체를 대수롭지 않게 대하는 내 태도에서 자신의 자의식 과잉 상태를 다시 돌아보고 인정하게 됐다고 했다.

물론 우울증 환자에게 이런 방법을 쓰라는 건 전혀 아니다. 우울증은 병원 가서 치료받아야 하는 질병이다. 상담 같은 것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다만 내가 보였던 태도가 우울증 환자들한테 꽤 필요한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가 심각하게 생각하는 게 사실은 별거 아니라는 깨달음이 있어야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그 고민을 가볍게 다룰 수 있어야 바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