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9월, 중국의 현대 화가 우관중은 소장 중인 작품 수백 점을 불태웠다. 그의 작품은 적게는 수억에서 많게는 수십억에 이르는 수준이었으니 한 점 한 점 불태우는 게 거의 건물을 날려버린 것과 같은 행동이었다. 예전엔 그의 이런 기행의 함의를 이해하지 못했으나 요샌 어떤 의미에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짐작이 된다.

창업한 후 그동안 만들었던 많은 포트폴리오를 쭉 살펴봤다. 조금씩 변화도 있고 발전도 했지만, 끝없는 자기복제의 향연이었다. 좋게 말해 스타일이고 브랜딩이지 냉정히 말하면 초기에 만들었던 프로토타입에서 크게 발전하지 못했다. 내가 실무에서 손을 뗀 지 오래됐음에도 여전히 내 초기 작품들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 있다.

끊임없는 변화와 혁신을 강조했음에도 새로운 오리지널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변주에 지나지 않는 아류만 잔뜩 남긴 셈이다. 만약 우리가 늘 처음 만드는 자세로 크리에이티브를 추구했다면 지금쯤 업계에서 탁월한 성과와 명성을 남기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결국, 이렇게 정체하게 된 건 변화가 필요 없는 환경을 내버려 둔 나의 안일한 태도에 있다.

최근에 진행 중인 프로젝트 파일만 남기고 기존 포트폴리오를 모두 폐기했다. 모든 레퍼런스가 사라졌으니 참조하려 해도 파일이 남아 있지 않다. 이제 모든 걸 원점에서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더라도 기존 레퍼런스를 바탕으로 변형하지 않는 걸 우리의 작업 원칙으로 삼기로 했다. 효율은 줄어들겠지만, 새로운 시도를 더 많이 하게 될 것이다.

혁신은 언제든 과거의 나를 버리겠다는 결단과 새롭게 시작해도 더 잘할 수 있다는 용기에서 출발한다. 멋진 1집을 내놓고 그것만 평생 우려먹는 스타는 무명의 가수만큼이나 씁쓸하다. 소포모어 징크스란 별 게 아니다. 새로운 도전이 기대에 못 미칠까 두려워하는 그 나약함이 만들어낸 허상이다. 가지고 있던 걸 버리지 못하면 새로운 걸 채워 넣을 수 없다. 창조의 시작은 창조적 파괴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