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현대 화가 우관중은 소장 중인 작품 수백 점을 불태웠다. 그의 작품은 적게는 수억에서 많게는 수십억에 이르는 수준이었으니 한 점 한 점 불태우는 게 거의 건물을 날려버린 것과 같은 행동이었다. 예전엔 그의 이런 기행의 함의를 이해하지 못했으나 요샌 어떤 의미에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짐작이 된다.

그동안 만들었던 포트폴리오를 쭉 살펴봤다. 꾸준히 변화하고 발전도 했지만, 끝없는 자기 복제의 향연이었다. 좋게 말해 나만의 스타일이지 냉정히 말하면 초기에 만들었던 몇 가지 프로토타입에서 크게 발전하지 못했다. 이렇게 오래 정체하게 된 건 변화가 필요 없는 환경을 내버려 둔 나의 안일한 태도에 있다.

기존 포트폴리오를 모두 폐기했다. 모든 레퍼런스가 사라졌으니 참조하려 해도 참조할 게 남아 있지 않다. 모든 걸 원점에서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더라도 기존 레퍼런스를 바탕으로 변형하지 않는 걸 작업 원칙으로 삼기로 했다. 효율은 떨어지겠지만, 끊임없이 새롭게 창조하게 될 거다.

혁신은 과거의 나를 버리는 결단과 새롭게 시작해도 잘할 수 있다는 용기에서 출발한다. 평생 한 곡만 우려먹는 스타는 무명 가수만큼이나 씁쓸하다. 소포모어 징크스는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는 나약함이 만들어낸 허상이다. 가지고 있던 걸 버려야 새로운 걸 채워 넣을 수 있다. 창조의 시작은 창조적 파괴에 있다.